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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9.25

 

 

 

'최치원 - 풍류탄생' (7월 30일 ~ 10월 12일)

장소 :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치원의 정신사상을 조명하는 즈음에 왜? 일까를 생각해 보니 우리에게는 하나로 단결하는 국민적 통합, 정신적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는 리더가 필요해서는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저도 이 전시회를 보기 전에는 최치원 선생님은 서예에 능한 분이라고만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전시회를 보며 많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번 전시는 ‘인문학’과 ‘예술’이 결합된 전시로 최치원의 삶을 조명하기 위해 인문학자와 예술가들이 직접 탐사하고 그가 남긴 시문을 서예. 현대미술, 서화, 설치미술, 사진, 영상, 가무등으로 재탄생 시킨 것이랍니다. 그럼, 최치원 선생님에 대해 알아볼까요?

올해 씨진핑이 내한 했을 때 최치원의 시를 한수 읊었다고 하지요. 당나라에서의 최치원의 입지를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렇게 당나라의 고서에도 최치원의 흔적이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최치원에 대한 자료가 별로 없어 다시 조명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부분입니다.

 

孤雲, 최치원(857~?)은,

신라 경주에서 육두품으로 태어나 12세에 당나라에 유학해 6년 만에 외국인 대상 과거시험이었던 빈공과에 최고 성적으로 급제했다고 합니다. 중국에 그 이름을 널리 알리고 황제에게 특별하사품인 금띠를 받았으나 이방인인 그가 당나라에서 올라갈 수 있는 지위는 한계가 있었다고 합니다.

28세에 귀국길에 오른 그는 6두품 출신으로는 최고 관직인 '아찬(阿飡)'에 올랐지만 신라에서도 신분제의 한계로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고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조'라는 사회개혁안을 올렸으나 이도 무위에 그치자 좌절한 그는 속세를 떠났다고 합니다. 신발만 남긴 채 가야산의 신선(神仙)이 되고 말았다고 전해지지만 그의 마지막에 대해선 누구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최치원(崔致溒)은 샤마니즘을 바탕으로 유교, 불교, 도교를 통합하여 처음으로 ‘풍류’에 대한 정의를 만들어 낸 인물입니다. ‘풍류’란 민간신앙인데 거슬러 올라가면 단군신화에서부터 신라의 화랑도에 영향을 끼친 그리고 현재 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무예뿐만 아니라 정신세계에 까지 영향을 끼친 한류의 원조격이 된 것입니다. 현재의 ‘k-culture'의 원조인 셈이죠.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우리의 고유한 문화, 사상, 풍속 등은 사라지거나 왜곡이 됐다고 합니다. 학계에선 대표적으로 왜곡된 용어로 ‘풍류(風流)’를 꼽는다고 합니다.

 

▲ 풍류라고 쓰여진 글씨, 박원규작품

 

신라시대엔 화랑도 탄생이 이념적 뿌리가 됐고 조선의 선비정신으로 그 명맥이 일부 이어졌지만 일제 식민통치 기간에 풍류는 사상으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멋지게 놀고 즐기는 행위로 왜곡돼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합니다. 결국“풍류? 그거 술 먹고 춤 추고 노는 거 아냐?” 그것은 잘못 왜곡 된 것이라는 거지요. 

화랑도는 “무리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혹은 서로 도의를 연마하고 혹은 서로 가락을 즐기면서 산수를 찾아다니며 즐겼는데 멀어서 못간 곳이 없다. 이로 인하여 그 사람의 옳고 그름을 알게 되고 그 중에서 좋은 사람을 가려 뽑아 이를 조정에 추천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화랑의 수양 방법은 노래와 춤을 즐기고, 산악을 숭배하던 고대의 제천 행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 전시회에 참여 작가는 총 38명이며 작고 작가가 2명(백남준, 박생광)이랍니다.

국내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서예가,· 화가,· 사진작가 30여명이 최치원에 대한 오마주(hommage, 존경·경의)가 담긴 50여점의 작품들을 선보이는 것입니다. 최치원의 문장과 글씨가 새겨진 탁본·문필집·현판 등 40여점도 한데 모아졌습니다.

 

▲ 최치원의 친필

 

최치원글씨 탁본

   

전시장에 들어서자 만날 수 있는 작품은 서용선작가로 최치원의 삶을 두 갈래로 파악, 설치작품으로 풀어냈습니다. 나무판 두개에 머리를 풀어헤친 고운, 관모를 쓴 고운을 거칠고 단순하지만 힘 있는 선으로 장승처럼 표현했습니다. ‘출세’와 ‘입산’을 나타낸 것이랍니다.

 

출세

 

입산

 

이층과 삼층의 벽에 전시된 영당(신불을 모신당)현판을 탁본한 글씨들입니다.

 

 

‘해운대’라고 쓰여진 탁본은 최치원이 벼슬을 버리고 가야산으로 가던 중 이곳에 머물러 아름다운 풍광에 매료되어 자신의 자인 해운(海雲)을 바위에 새겨 넣은 것이 해운대라 불리게 된 시조라고 합니다.

 

 

삼층의 입구에는 종이로 만든 주황색의 아주 큰 연꽃이 빛을 받아 화려합니다.

 

정종미작가의 연꽃

 

작고하신 백남준작가의 ‘자화상’이란 작품은 tv모니터에 불상과 사람의 얼굴이 오버랩되는 신기한 작품이었습니다.

 

백남준작가의 자화상

 

삼층의 전시실에는 최치원의 극락영생을 비는 작품도 있었습니다. 연꽃을 바닥에 깔고 용이 환생하는....

 

 

서예 작품들과 회화가 어울려 볼 것이 많았습니다.

 

 ▲ 황재형작가님의 회화작품들

 

홍지윤작가의 ‘접시꽃들판에 서서’는 화려한 색채가 눈을 끌었습니다. 실제 최치원은 접시꽃에 대한 시를 썼답니다.

 

 

설치미술가 최정화씨의 ‘신발 용됐네’ 작품을 보며 ‘이게, 뭐지?’라는 의문이 있었지만 이내 해설을 듣곤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전날 고속터미널 상가에서 보았던 실내화가 작품이 되어 있었으니....... “최치원에게 신발은 중요한 상징물이었답니다. 그는 가야산 자락에서 신발만 남기고 종적이 묘연해졌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그가 신선이 됐다고 믿었고 이 작품은 거기서 모티브를 따온 것이랍니다. 가야산을 지키는 용이 됐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랍니다.

 

 

많은 작품을 전부 올릴 수 없어 몇 개의 작품을 설명없이 올립니다.

 

 

이 전시를 보며 우리민족은 풍류를 즐기는 낙천적이고 도(道)를 지키는 예의 바른 민족임에 다시 한번 긍지를 느껴 봅니다.

‘불교는 수신(修身)의 근본이고 유교는 치국(治國)의 근원’이라는 말씀을 되새겨 봄니다. 우리의 한류가 최치원선생이 원조였으며 그것은 풍류에서 나온 것임을 배우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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