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 김장축제를 참가하려고 새벽녘에 서울을 출발해 일찍 도착, 시간이 여유가 있어 가던 길에 전봉준 장군 단소 안내판에 이끌려 찾아갔습니다.

요즘은 시골도 다 현대화 되어 옛정취가 사라졌음에도 이곳 전라북도는 아직도 시골 정취가 남아 있어서 마치 고향에 온 듯 했습니다.

고향이 이쪽 중앙쪽이다 보니 시골에 가는 것은 일부러 여행을 가지 않으면 안되는 처지라 오랜만에 한적한 시골 논길을 달리며 느껴지는 냄새와 고요함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습니다.

 

먼길을 달려온 피로감이 씻길 정도로 덜 오염된 시골 길을 얼마나 꼬불꼬불 달렸는지 멀리 비석하나가 보였습니다

 

 

 

 

120년 전에 갑오경장과 동학농민혁명이 있었는데 다들 사느라고 바쁜건지 싶어 우리의 역사현장을 한번 이왕 온 김에 돌아보게 된 것인데요.

전봉준 장군 단소는 전봉준 장군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아 허묘를 조성한 것이고 했습니다.

 

우리 초등학교 사회시간에 녹두장군 전봉준으로 먼저 “새야~새야~ 파랑새야~~~” 노래로 익숙했던 것이 문득 생각났는데요. 역시 비에도 전봉준 장군의 일러스트레이션과 노래 가사가 적혀 있었습니다.

 

 

 

 

 

전봉준 장군은 악덕지주 조병갑의 횡폐에 저항하고 동학농민운동에 앞장섰던 분이라고 배웠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래서 좀더 사전에 나와있는 것을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습니다.

 

동학농민혁명은 <조선 고종 31년(1894)에 동학교도 전봉준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혁명이다.교조신원운동의 묵살,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의 불법 착취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한 불만이 도화선이 된 혁명은 조선 봉건사회의 억압적인 구조에 대한 농민운동으로 확대되어 전라도·충청도 일대의 농민이 참가하였으나 청·일 양군의 진주(進駐)와 더불어 실패했다. 이 운동의 결과 청·일전쟁이 일어나고 우리나라에는 일본 세력이 점점 더 깊이 침투하게 되었다>는 것인데요.

 

 

 

 

 

전봉준 장군은 1855년 전라남도 고부군에서 전창혁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땐 몸집이 작아 녹두라는 별명이 있었습니다.

아버지 전창혁이 군수 조병갑의 횡포로 농민들에게 돈을 다 뜯어가서 항의하러 갔다가 곤장에 맞아 사망하자,이에 조병갑에게 찾아가 세금을 낮춰달라고 했지만 말을 들을 턱이 없었고 결국 1894년 1월 농민을 이끌고 봉기합니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결정지은 역사의 일대 사건이자 봉건질서 타파와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는 항일 독립정신으로까지 길러주었다고 하는데요.

 

 

 

 

누군가 묘소앞에 초콜릿과 귤을 두고 갈 정도로 학생들의 종이학 통도 있었구요. 공적을 기리는 많은 비석들이 얾음 들판 한가운데 있어 머리를 조아리며 지난 역사를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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